개요
세종(1397년 ~ 1450년)은 조선의 제 4대 국왕으로 재위기안은 1418년~1450년 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로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어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과학기술,예술, 문화,국방 등 여러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백성들이 글을 몰라 농사에 관한 책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혼천의, 앙구일구, 자격로,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도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궁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 국경을 확장하였다.
정치면에서는 황희와 맹사성, 윤회, 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러한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으며 법전과 문물도 정비하여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많은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우리는 그를 '세종대왕'으로 부르고 있다.
왕자 시절
1397년(태조 6년) 5월 15일 한성에서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여섯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08년(태종 8년) 충녕군에 봉해졌으며 같은해에 소헌왕후가 되는 심온의 딸과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여 한시도 책을 손에 놓치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이 안좋았다고도 한다. 이제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412년(태종12년) 효령대군과 함게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이 되었다. 충녕대군은 형제간 우애가 깊었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알려져있다. 친동생 성녕대군은 직접 병간호를 할만큼 우애가 각별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첫째 아들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과는 갈등이 있었다. 양녕대군은 기생을 궁에 몰래 들이고 학업보다는 여러사람들과 어울려 노는것을 더 좋아하여 이를 충녕대군이 동생임에도 지적을 하였다고 한다.
세자 책봉과 즉위
1418년(태종18년) 6월, 태종은 세자 양녕대군의 여러 비행에 고심하던 중 신료들의 폐세자 주청에 대한 상소가 연이어 올라오자, 세자의 행동이 종사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자를 폐위시키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였다. 같은 해 8월, 태종은 세자 충녕대군에게 양위하였고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재위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권과 인사권을 직접 행사하였다.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리고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도록하였다.
그리고 유교를 장려하여 '삼각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치세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사대정책을 취하였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정벌계획을 수립하여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압록강 상류에 4군을, 두만강 하류에는 6진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초기에는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대마도주는 조선에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1420년(세종 2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기관으로 집현전을 설치하였다. 1443년(세종25년), 세종은 백성들이 한자를 쉽게 배우지 못하며, 우리 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 원하는바를 표한하기 어렵다 생각하여 28개의 글자를 창제하였다. 글자의 모음은 음양의 원리로, 자음은 오행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어 1446년(세종28년)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으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관장하게 하는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하였다. 세명의 정승이 권력남용을 할 수도 있음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니는 않고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게 하여 공정하게 공과 사를 명확하게 하도록 하였다. 맹사성, 황의, 권진, 김종서 등의 재상들에게 일정 부분의 권한을 위함하고 정무를 주관하게 했다.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 혼천의, 혼상, 해시계, 물시계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궁중에 흠경각이라는 일종의 과학관을 세웠다.
또한 음악에도 관심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편경과 편종 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음악을 기록하게 하였다.
최후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고,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치세 말년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세자 향(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였고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고 불교 사원을 방문하여 불교의 힘들 빌렸다. 1450년(세종 32년) 2월, 병세가 악화되어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를 세종으로 세종의 세는 '번성'을 의미하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태평성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능은 영릉으로 소헌왕후와 한 봉분 안에 묻혀있는 합장릉으로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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