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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조선시대

조선의 10대 왕 - "폭군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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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개요

연산군(1476년~1506년, 재위기간 1495년~1506년)은 조선의 10대 국왕이다. 아버지는 조선의 9대 왕 성종이고 어머니는 폐비 윤 씨이다.  재위기간 중에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 세력을 제거하고, 갑자사화를 일으켜 어머니 폐비 윤 씨의 폐위에 관련된 자들을 대량으로 숙청하고 훈구 세력을 약화시켰다.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을 약화시킨 후 홍문관, 사헌부, 예문관 등을 없애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를 축소하거나 폐지시키면서 독단적인 정치를 행하였으며, 공포정치와 가혹한 고문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박원종, 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유배후 2개월 뒤에 역질, 화병등으로 사망하였다.

 

출생과 세자 시절 그리고 즉위

연산군은 1476년 성종의 장자이자 성종의 계비인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이름은 무작금이다.  아버지 성종은 후궁이 많았고 어머니 폐비 윤 씨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1479년 인수대비는 윤 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을 빌미로 후궁들과 함께 윤 씨를 왕비에서 폐하고, 궁궐에서 내쫓는다. 세 살 때 어머니가 폐위, 사사되면서 연산군은 계모 정현왕후의 아들인 것처럼 성장하였다. 

연산군은 1483년 세자에 책봉되었고 허침,조지서,서거정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세자시절에 연산군은 유학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연산군은 유학자들의 세상이 아닌 중앙집권국가를 더 원했기 때문이었다.

1495년 아버지 성종이 승하하자 세자였던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즉위이후

즉위초반 연산군은 녹도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방비를 강화하려 변방이주를 장려하였다. 이주를 하게 되면 면세, 부역 면제를 시켜주었고 변방의 성곽 개보수에 힘쓰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사창, 상평창 등을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려 하였으며 국조보감, 동국명가집 등을 간행하는 등 다수의 업적을 이룩하였다.

즉위 이듬해부터 어머니 폐비 윤 씨를 왕후로 복권시키는 일을 추진하다 이에 강하게 반대하는 사림파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학문을 강요하고 사사건건 간쟁을 일삼는 사림파의 태도가 항상 불만이었다. 그러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의 원고가 된 사초 '조의제문'의 불충함을 명분으로 하여 연산군과 훈구파가 대대적으로 사림파를 숙청하였다. 이를 계기로 사림파는 크게 위축되었고 훈구파가 조정의 주세력이 되었다. 이를 무오사화라고 한다.

1504년 연산군은 훈구파 내의 분란을 이용하여 폐비 윤 씨의 한을 풀고자 했다. 폐위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을 비롯하여 당시의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사망한 이들은 부관참시했다. 후궁의 자식들은 폐서인하여 유배를 보내고 일부는 유배 후 죽였다. 이 일련의 사건을 갑자사화라고 한다. 

연산군은 그의 폐륜적인 행위에 대해 질책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한글책을 불사르게 하였으며 한글을 배우거나 쓰지 못하게 했다. 이를 어기면 공장과 참수형에 처하게 했다. 

연산군은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았으며, 한성부 내 각 사찰을 연회장, 유흥장으로 만들었고 이때  지방 각지에서 흥청(연산군이 여색에 빠져 선발한 여인을 일컫는 말)들을 선발하였다. 이후에 흥청을 데리고 놀던 연산군이 망하였단 의미로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의 심한 고문행위를 행하였고 능지처참, 부관참시 등 각종 악형을 가하였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유배 보내는 등 전형적인 폭군으로 기억되고 있다.

 

폐위와 최후

1506년 연산군의 실정이 극에 달하자 훈구파를 중심으로 연산군을 폐위하려고 정변이 계획되었고 이에 이조참판 성희한, 박원종 들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의 측근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한 후 성종과 정현황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다. 연산군은 폐위된 후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추방되었다. 장녹수를 비롯한 연산군의 후궁들은 사형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아들도 살해당한다. 유배된 지 2개월 뒤에 역질과 화병 등으로 사망하였다. 같이 유배되었던 연산군의 아들들도 모두 처형당했다. 이는 훗날 이들 왕자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사망 후에도 왕자의 신분인 군으로 강등당했고 조선 왕실의 족보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재위기간의 실록 역시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훗날 폐위된 15대 왕 광해군과 더불어 조선시대 폐주였던 연산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되며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즉위 초기 의욕적으로 정책을 시행하던 연산군은 어머니의 사건의 영향으로 각종 폐악, 패륜을 저지르며 3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유배시절에는 유배지를 지키는 별감과 상궁조차도 그를 조롱하였다고 한다. 앞으로도 그의 이름은 영원히 폭군의 대명사로 남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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